임방울은 선천적으로 천재적인 성음을 타고난 가객이다. 그의 성음은 천구성에 수리성을 더 하고 있다. 천구성이란 높은 소리, 낮은 소리를 두루 구사할 수 있는 힘차고도 역량이 풍부한 성음을 말하며, 수리성은 약간 갈린듯하면서도 구수하게 곰삭은 맛을 풍기는 성음을 이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음을 겸비한 임방울은 최상의 자질을 타고난 가객이다.

임방울은 자유자재한 성음에 성량 또한 풍부하여 막힌 데가 없었다. 下聲, 平聲, 上聲을 마음먹은 대로 구사해서 목청을 좌우로 제켜가면서 힘차게 뽑아내 들려주면 청중들은 모두 열광과 찬사의 추임새를 보냈다. 전통적인 소리목의 구사와 함께 임방울 특유의 푸는 목, 감는 목, 찍는 목, 떼는 목, 미는 목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청중을 휘어잡았다.

임방울의 소리에는 계면조의 기교 개발에 있어 당돌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임방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점이라 하겠다. 당시 웅장 고졸한 우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임방울은 이러한 우조에 애련·처절한 계면조를 접목시켜 새로운 임방울 스타일의 소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동편제와 서편제는 판소리 법제를 말한다.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로 나누어지고, 경기도 이남과 충청도에서는 중고제가 주로 불리어졌다.

동편제는 우조를 주장하며, 대체로 기교가 없이 단순 소박하나 웅장 호방한 가풍이다. 송흥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강도근 등의 명창이 동편제로 분류된다. 서편제는 계면조를 특히 잘 구사하며, 기교가 다양하고 애련한 맛이 짙은 소리 스타일이다. 박유전, 정창업, 이날치, 김창환, 이화중선, 정정렬, 박초월 등의 명창이 서편제의 대가들이다. 중고제는 경기 무가 및 경기 민요조의 소리가 판소리에 투영된 것이다. 김성옥, 이동백, 김창룡 등이 주로 불렀으나 지금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임방울은 어려서는 외숙 김창환에게서 서편제를 익혔으며, 유성준에게는 동편제를 익히고, 나중에는 독자적인 자기 소리를 만들어서 ‘임방울제’로 소리를 하였다. 판소리의 법제 계보를 따진다면 임방울은 동편제에 속한다. 그러나 기교가 넘치는 그의 창조에는 애원 처절한 서편제적 요소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길러낸 제자들인 한애순, 장영찬, 성우향, 신평일 등도 동편제이면서도 서편제의 창제요소가 짙다.

임방울은 계면조를 가장 계면조답게 부른 명창이다. 임방울의 계면조 창법은 일제 강점기, 임방울이 살던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과 시대적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임방울이 활동하던 당시엔 소리판의 환경이 변화했다.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판소리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던 양반층이 사라지면서 판소리 광대들이 설 자리도 사라져버렸다. 판소리 광대들은 자기 예술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예전의 판소리 기반이었던 서민 대중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고도하게 우아해진 예술을 뒤로하고, 민중 취향의 판소리를 다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임방울이 서민 대중에게 다가가는 판소리를 하였을 때 전략으로 택한 것이 바로 계면조였다.

임방울의 서민적이고 파격적이다. 사투리를 심하게 구사하면서 청중에게 다가간다. 외설적인 걸찍한 재담을 연행하면서 서민의 취향에 가까이 다가갔다. 예전 판소리에서는 판소리에 재담적 요소가 많았다고 하는데, 20세기에 들어서 점점 재담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여류 명창의 경우 재담을 늘어놓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다. 임방울 판소리는 판소리의 재담 전통을 잘 살리고 있다.

임방울 <수궁가>에서 ‘별주부 마누라와 하직하는 대목’의 걸찍한 재담을 함께 들어보자. 임방울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전언이나, 실황음반에 함께 실려 있는 청중들의 반응을 조사해보면, 확실히 이 재담 대목에서 폭소가 많이 터져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방울은 즉흥적 변개에 능한 예술가였다. 스승의 소리를 고집하다 보면 판에 박힌 소리를 하게 되지만, 임방울은 특별나게 스승에게서 배운 전통 법제를 고집하지 않고, 판에 따라 다양하게 변개하면서 판을 이끌었다. 임방울 식의 독특한 미의식으로 소리판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임방울은 소리의 계통이나 법도를 한편으로 존중하기도 했으나, 이보다는 자신의 선택과 민중층의 평가를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보인다. 송만갑의 예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에 이르게 되면 과거의 법통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많이 가시게 되었다.


소리판의 조건도 열악해져서 족보와 법통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임방울에게 있어서도 법통은 금과옥조로 삼아 보존해야할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살찌워줄 다양한 자양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판에 임하여 자유롭게, 그 판의 성격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연행하는 것이 원래 소리판의 모습이었다. 그 전통을 임방울이 적극적으로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임방울은 전통적 의미에서도 현대적 의미에서도 진정한 작곡가였다. 임방울의 작곡자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 노래로 앞에서 들어본 ‘추억(追憶)’을 들 수 있다. 이 노래는 임방울이 직접 만든 작품으로 당시에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사랑받았다.

단가 ‘명기명창(名妓名唱)’은 ‘팔도유람가’라고도 하는데 임방울이 작곡했다고 전한다. 멋있는 명기 명창을 데리고 풍류랑과 산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즐기자는 내용이다. 중모리 장단으로 짜여져 있다.

임방울이 섰던 자리는 화려한 무대보다 시골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한 음유시인이 임방울에게 걸맞는 칭호일 것이다. 식민지 민중의 한을 대변해주는 음유시인이자, 골계를 통하여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 진정한 광대.

외롭고 슬펐던 삶의 길에서도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자긍심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아름답고 영원하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예술은 독창적이다. 그는 당대에 광대라는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예술인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 사랑받는 광대 예술인이 되게 하였다. 애초 민초들 사이에서 생겨나 민초들 사이에서 성장한 판소리 본래의 존재 양식을 지켜오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임방울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