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임방울을 수식하는 호칭으로 ‘명창’에서 ‘국창’으로 옮겨와 불렸다. 그러나 임방울은 임금 앞에서 소리하기 위하여 벼슬을 받은 적도 없고, 1960년대 이래 국가에서 지정하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의 예우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국창’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임방울이 국창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임방울은 소리의 계통이나 법도를 중시하기보다 서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한의 심성을 잘 노래한 당대 최고의 가객이었다. 빼어난 성음과 목구성으로, 서민취향을 반영하여 처절한 서름조로 퍼버리고 통곡하면서 판을 장악하여, 민족의 한을 대변해 온 것이 아마도 임방울을 국창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예술가로 인정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임방울이 가객으로 활약하던 시기는 민족사적으로나 판소리사적으로 가장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다. 임방울은 질곡의 역사와 부침의 세월을 살아 온 민족의 한스런 정서를 온몸으로 울어 토해냈고, 핍박 받는 민중과 인정을 나누며 살다 간 소리꾼이었다. 서민의 사랑과 지지에 의존해서 판소리의 외길을 걸으면서, 한스런 가락으로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면서 판소리의 명맥을 지켜 온 소리꾼이었기에, 국창이라는 칭호, 국민이 내린 칭호에 값하는 국창이 되었던 것이다.

 

판소리와 같은 형태의 민중적 공연예술은 유동성, 현장성, 즉흥성을 속성으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과 청중의 요구에 따라서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판소리의 애호층이 변화하였고, 변화된 청중들의 판소리 취향을 판소리 가객들은 일정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송만갑, 정정렬, 임방울은 이와 같은 수용층의 변화와, 새로운 수용층의 취향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판소리의 내용을 거기에 맞게 적용시켜 자신의 스타일로 완성해낸 대가들이다.

특히 임방울에 있어서 그 변화의 정도가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임방울은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 옆에 서서 활동한 예술가였다. 서민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민들의 문제를 대변하고, 그들을 웃기며 울렸던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 임방울의 초상이다. 임방울 판소리의 사설과 음악적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서민적 요소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임방울 소리는 서민에게 아주 친밀하고 서민의 애환을 다룬 노래이자 이야기이자 연극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