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울은 6.25 이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왔다. 오는 길에 북한군을 만나 포로로 된 적도 있었는데, ‘쑥대머리’ 한자리를 부르고 풀려났다고 한다. 광주에서 피난 생활하던 동안의 행적은 명료하지 않다.

임방울은 1954년 5월 21일, 釜山 범일동의 부산진 시장에서 가설극장에서 열린 <古典音樂祭典>에서 열창을 한다. 이 자리에는 줄타기의 달인이라고 불리었던 김영철이 특별히 출연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방울은 박록주등과 함께 <심청가>, <춘향가>를 공연, 절찬을 받았다.

 

임방울은 몇차례 일본공연을 가졌다. 50년대 후반, 임방울은 한국예술단 환영위원회 주최로 박귀희, 임춘앵, 임유행, 박왕진, 이진관, 안복진, 고미라 등과 함께 일본공연을 다녀왔다. 한번은 임춘앵 일행과 함께 <견우직녀>를 가지고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였다.

이 공연 후 임방울은 급작스럽게 몸이 쇠약해진다. 임방울은 일본 공연에서, 당시로는 금기였던 조총련계에서 공연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임방울이 귀국한 직후 정보기관에 불려가서 한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고수 주봉신 명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증언한 바 있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1957년 4월 원각사(圓覺社)에서 <朴初月 문하생 발표회> 직후에 임방울의 건강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초월 문하생 발표회>는 임방울이 김연수, 박귀희, 박봉선, 성우향, 한농선, 조통달 등과 함께 특별출연하여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애초에 이틀간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4일간으로 연장되었다. 임방울은 이 공연 내내 기침이 심하고 숨이 차오르고 목소리까지 약해졌다.

1960년 봄, 부산 공연 때였다. 임방울은 무대에서 자신의 특장이었던 <쑥대머리>를 부르더니, <심청가> 가운데서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불렀다. 장내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춘향가> 한 대목을 내더니, 다시 <수궁가>로 옮겨와 이것저것 마구 바꾸어 불렀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임방울은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도 소리를 질러 내어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해 가을, 임방울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제 공연에 나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를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길로 서울 초동 집으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1961년 3월 8일 새벽,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임방울이 57세 되던 해였다.


임방울의 장례식은 국악인의 장례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그날,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었다. 소복을 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지날 때 서민들은, 서민의 목소리 국창 임방울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김소희 명창을 포함하여 몇몇 명창들이 앞소리를 맡고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떠나는 님의 상여끝자락을 잡고 뒷소리를 맡으며 흐느꼈다. 사는 동안 슬펐던 소리 광대의 화려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선도하는 트럭에는 삼현육각을 잡히고, 만장 수백 장이 늘어서 있고, 그 뒤를 소복한 여인들이 꽃상여를 메었다. 가장 한국적인 소리광대를 싣고 상여는 움직였다. 시청 앞에서의 노제를 거치고 그의 운구행렬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임방울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한(恨)의 소리와 함께 묻혔다. 어린 딸이 관속에 낡은 음반 한 장을 묻어 그 자리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 국창 임방울 장례 행렬 >
한동안 잊혔던 임방울을 다시 되찾아오는 일이 그가 죽은 뒤 25년쯤 지나면서 차차 생겨났다. 1986년 9월 12일, 광주 광산구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선생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8년 11월 20일에는 망우리의 묘가 여주 남한강 공원묘지에 이장되었다. 1992년 12월에는 광주 문화예술회관에 <국창임방울 선생 흉상>이 세워졌다.

1977년 8월에 송정청년회의소 주최로, <제1회 임방울명창기념 명창경연대회>를 열었으며, 이를 기화로 삼아 1999년에는 <(사) 국창임방울선생기념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임방울에게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에는 <(사) 임방울국악진흥재단>으로 통합하여 <임방울 국악제>를 지속적으로 운영하여 임방울을 기리고 있다.

임방울이 위대한 소리꾼으로 후세에 남고, 후세 사람들이 그의 예술을 통해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의 서민적 예술혼이 가치 있는 민족예술로 평가받고 후세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게 하는 일은 민족예술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